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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해상전역

1. 서언

최근에 와서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고구려 유적에 대한 한국인의 접근을 차단하는 행동 등을 함으로서 우리의 분노를 촉발시키고 있는 한편, 우리에게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대륙적인 기질을 가진 국가로서 군사 활동도 우수한 성에 의한 방어전와 기마병에 의한 기동전을 주로 하는 지상전 중심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에 버금가는 동북아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지상군의 활동만으로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지상군에 병행하여 강력한 수군의 활약이 있었을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 왔는 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고구려의 해양진출

고구려는 기원전 277년에 압록강 중류 지역과 혼강(渾江) 유역을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영토를 계속 확장하여 1세기 말까지는 함경남도, 강원도 북부, 대동강 이북의 평안도 그리고 연해주까지 확보하게 되었으며, 3세기 초에는 요동반도와 황해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지역의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게 됨에 따라 고구려는 동해와 서해안에 넓은 해안선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또한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압록강, 송화강, 청천강, 대동강 등의 해안 출구를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바다를 이용하여 중국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또한 한반도 남쪽의 소국(小國)들과 왜의 중국을 향한 해상교역로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이 최초로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233년 양자강 하구에 있는 오 나라까지 고구려 선박이 왕래한 것으로『삼국지(三國志)』오지(吳誌)에 기재되어 있다.

229년 위와 대립하고 있던 오 나라 손권은 요동지역에 있는 공손연과 연합하여 위를 포위하기 위하여 해상으로 수 백 명의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위의 위협을 의식한 공손연이 오의 사절을 박해하고 감금하자 이들 중 일부가 고구려로 피신하여 왔다. 당시 고구려는 인접하여 적대관계에 있던 공손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멀리 있는 오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즉 원교근공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동천왕(東川王:11대)은 이들을 고구려 선박으로 호송할 인원 25명을 파견하여 본국에 귀환하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 함선은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하여 적국인 위의 해역을 통과하여 양자강 하구까지 항해를 하였던 바 이는 고구려의 수군이 상당한 수준의 함선과 항해술을 보유한 것을 입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동진(東晋)과도 국교를 맺고 사신이 수차례 해상으로 왕래하는 등 중국과 해상을 통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3. 광개토대왕의 해상전역

가. 배경

(1) 대왕의 생애

고구려 제 19대왕인 광개토대왕은 그 익호 국강상강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의미하는 것처럼 재위 22년간에 국력의 신장과 국토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집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 잘 나타나고 있다.

대왕 사후 2년인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이 비석은 높이가 6.3 미터이며 사면에 1천 8백여 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374년에 출생했다.

13세 때에 태자가 되었고, 18세인 391년에 왕으로 즉위하여 22년 동안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다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본명이 담덕(談德)인 광개토대왕은 사람 됨됨이가 호매영특하고 군사의 지휘력이 신묘하여 즉위 이래 남정북벌(南征北伐), 동토서략(東討西略)하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그 결과 중국과 영유권을 다투던 요동을 차지하고,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고구려가 만주대륙의 완전한 주인공이 되었으며 남으로는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것이다.


(2) 정세

고구려는 왕권이 강화되고 영토를 넓혀감에 따라 주변국과의 마찰이 많아졌으며, 따라서 많은 시련도 따랐다.

제 11대왕인 동천왕(東川王) 때는 위의 침공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왕은 남옥저까지 도주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으며, 16대 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인 342년에는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이 함락되고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비롯한 5만명의 인원이 잡혀가는 수모를 당했다. 또 남으로는 백제의 침입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 왕으로 등극한 광개토대왕은 국가의 안정에 우선순위를 두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선 북방에 대한 후연과의 전쟁에서 안정을 유지하게 된 대왕은 남쪽의 백제에 대한 군사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때 가야와 왜를 동맹국으로 한 백제가 비교적 약체인 신라를 압박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와 신라는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백제에 대한 대왕의 군사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주전선은 지금의 예성강 유역이었다.


나. 남방공

(1) 관미성(關彌城) 탈취

대왕 2년(392년) 7월에 대왕은 군사 4만을 직접 거느리고 백제의 북방 국경지역에 쳐들어가 석현 등 10개의 성과 한강 이북의 여러 부락을 함락시켰다. 또한 그해 10월에 대왕은 백제의 북방 요새지인 관미성(강화도 동북단 또는 파주의 오두산성으로 추정)을 쳤는데, 이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해수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왕이 군사를 11개 부대로 나누어 20일 동안이나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예성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탈환하기 위한 조치인 동시에 서해의 해상권 쟁탈의 요충지를 탈취함으로서 서해의 해로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사방이 해수로 둘러싸인 이 관미성은 한강과 예성강 하구에 위치하여 백제의 변방을 방어하는 해륙상 요지이기 때문에, 그 후 백제가 이 성을 탈환하려고 여러 차례 공격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 위례성 공격

대왕은 즉위 6년(396년)되는 해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는 해로원정(海路遠征)을 실시하였다.

대왕은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하구 등 서해안 각 항구에 집결한 많은 함정을 출동시켜 장산곶을 돌아 한강 하류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강화도, 영종도 등지의 백제수비군을 격파하고, 한강 하류의 여러 성을 공략하며, 한편으로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하남 또는 광주로 추정) 부근까지 육박하였다.

처음 고구려의 상륙부대는 한강의 남·북안을 따라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남안부대는 미추흘(彌鄒忽:인천)을 점령하고 동진하였으며, 북안부대는 지금의 고양 부근으로 상륙하여 한양을 차지하고 아차산성을 넘어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압박하는 수륙병진의 대공세를 취했다.

백제도 굴하지 않고 한강연안과 도성 부근의 방비를 강화하였고 고구려군에 대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 병사들의 맹공에 백제의 방어진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고구려군은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에 육박하게 되었다.

수도의 방어가 불가능하게 된 백제는 결국 항복하고 아신왕(阿莘王:17대)은 고구려 진중에 나와 무릎을 꿇고 “지금부터 영원히 대왕의 노객(奴客)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며 예물을 바쳤다.

대왕은 백제의 이전의 허물을 용서하며 58성과 700촌을 탈취하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열 사람을 볼모로 데리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대왕의 공격은 수도의 공격과 더불어 서해 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이는 백제의 수군 활동이 마비되고, 또한 대중국 교통로가 차단되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은 백제가 고립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이 약화될 것을 노린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왕 2년과 6년의 백제공격은 백제의 해상세력을 약화 또는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고구려가 황해 중부 연안의 제해권을 본격적으로 장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출동병력의 수가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전후에 대왕이 친정(親征)했던 병력의 규모로 보아 적게는 7~8천에서 많게는 4~5만에 이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병력을 수송 및 호송하는 데 동원된 전선 또한 상당한 수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정규 수군에 의한 대규모의 해상원정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구려가 발해와 황해 중부권 이북의 제해권을 장악한 해상강국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백제, 왜 연합군 격퇴

뜻하지 않은 고구려의 해상원정에 의하여 참패와 굴욕을 당한 백제에서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제 단독으로는 고구려의 힘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구원을 청할 것을 결의하였다. 고구려의 원정이 있은 다음 해 백제는 일본에 전지태자(月典支太子:뒤에 귀국하여 18대 전지왕이 됨)를 청병사절로 보내어 일본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한 보복전을 전개하고자 계획하였다.

당시 일본은 백제를 모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또한 신라의 세력이 점차 커짐에 따라 한반도를 통한 선진 문물 수입에 어려움이 생겨서 한반도에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백제의 요청에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백제는 많은 일본의 병력을 얻어 해륙상으로 고구려에 대한 복수전을 전개하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우선 고구려의 동맹국이면서 약한 신라를 먼저 침공하기로 하였다.

대왕 9년에 신라의 사절이 찾아와 백제가 왜적과 내통하여 신라를 공격하므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대왕은 10년(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에 침범한 왜적을 격퇴하고 추격하여 낙동강 하구에서 이들을 궤멸시켰다. 이때 수군도 멀리 동해북부 해안에서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왕 14년(404년)에 왜적이 서해안의 대방계 (帶方界:황해도 해안 지방)에 침범하였기 때문에 대왕의 군대가 왜적을 맞아 무찔러 적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전역은 백제와 왜 연합군이 대고구려 전쟁에서 불리한 전세에서 이를 역전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육로를 피하고 수군을 이용한 적의 배후를 기습 공격하고자 해상으로부터의 상륙작전을 시도한 것으로 인한 대규모 전투였다는 사실로 보아 다수의 수상전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수군이 해상에서 적 함대를 요격하거나 유격전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다. 북방공략

한편 고구려의 북방영토의 회복을 위한 전쟁경과를 살펴보면 370년 이후 전연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여 376년에는 전연을 격파하였다. 전연이 망하고 후연이 나타나자(384년), 고구려는 후연도 공격하여 요동 땅을 회복하였다.(385년)

대왕 즉위 후에 후연왕인 모용성이 고구려 북쪽에 있는 남소성과 신성 등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의 상당한 지역을 차지하였다.(400년). 그후 반격에 나선 고구려는 402년에 요하를 건너 후연의 평주 중심지인 숙군성을 공격하여.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를 축출하여 버렸으며, 이후 대왕은 요동에 남아 있던 후연의 근거지를 차례로 함락시킴으로써 요하 동쪽의 전부를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뿐만 아니라 404년에는 고구려 수군이 후연의 연군(燕郡: 山海關부근)에 대한 원정작전을 전개하여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요동반도에서 연군까지는 발해를 가로 지르는 2천리 길을 항해해야 되는 대규모 원정인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전연과 후연을 상대한 전쟁을 전개할 때 고구려는 지상군과 병행하여 수군이 활약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후연을 격파한 시기에는 고구려 수군이 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상륙전을 감행할 정도로 조직적인 능력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4. 결언

광개토대왕이 만주 일대에 영토를 확장하여 국위를 떨쳤으며 백제에 대한 해상원정이나 서해상에서 왜구를 격퇴한 사실로 보아 이 당시 고구려의 수군이 백제와 신라는 물론 왜와 후연을 제압하는 막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군의 해상원정과 전투행위는 강력한 수군력과 든든한 국가의 재정이 지원되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특히 해상원정을 수행하려면 상대방의 무력을 압도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비교적 방대한 군사력(수군, 상륙군 등)과 해상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는 대형함선 수십 척 또는 수백 척이 있어야 하고 다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이 확보되어야 하며, 복잡한 전투상황에서 작전과 전술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준비된 함대와 해상지휘관이 있어야 원정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개토대왕 시대의 고구려는 서해북부와 발해의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백제, 왜, 후연 등과의 해상전역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다음의 왕인 장수왕(長壽王)이 15년(427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는데 이러한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는 당연히 백제 및 신라와의 육상전역에 치중하게 되었고, 그후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대륙방면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해상방위의 소홀과 함께 고구려의 해상 활동은 점차 위축되어 간것은 아쉬운 일인 것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5-02-01 16: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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