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MR뉴스 무기체계 컨텐츠 신제품 유료존 MR기네스 KNIVES 특수부대 軍뉴스 프리존
KDX와 함께 떠나는 한국 해군사 (I)

1단계 한국형 구축함(KDX-1) 3척에는, 광범위한 정벌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광개토대왕,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의 백만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당태종이 대군을 몰고 쳐들어오자 안시성에서 치열한 전투끝에 물리친 양만춘. 모두 고구려인을 인용하여 해외훈련 등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임을 세계만방에 알려 왔다. 사실 우리가 북방사에 눈을 돌린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붉은 악마가 배달국의 지도자이자 전쟁의 신이며 군신인 치우천왕을 상징물로 들고 나와 관심을 끌었고, 중국이‘현재의 중국 영토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우리의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하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 전방위로 군사적인 진출을 하여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다. 특히 본격적으로 해양활동을 하였고 해양을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힘으로 활용하였다. 대왕은 385년에 요동과 현토를 점령하였는데, 이는 단순하게 육지영토를 확대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고구려가 요동반도의 서한만, 대동강 하구, 그리고 경기만을 잇는 긴 황해중부 이북의 동안 해상로를 확보한 데서 의미가 있다. 요동만을 장악한 탓으로 산동 등 아래지역과 해양활동을 벌이는 데 유리하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이는 농경지를 확보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영토를 확대하여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한다는 목적을 넘어서 동아시아 질서재편이라는 거시적인 관점과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행해졌으며, 특히 해양활동이라는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능비문에 따르면 대왕은 병신년인 396년에 대규모의 수군을 투입하여 수륙 양면적으로 공격을 했다(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육년병신왕궁솔수군토벌잔국군). 이 작전의 성공으로 왕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경기만의 북쪽은 물론이고 남양, 서산, 당진 등 남부해안 지대 등을 상당한 기간 동안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백제의 해상세력을 약화시키거나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고구려는 황해 중부 연안의 해상권 장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지정학적인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통적인 대륙 위주의 질서를 기본으로 삼고,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인 질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남·북으로 팽창되고 마침내 대제국을 건설하여 북위에게서 남조정권보다도 우위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 을지문덕

수 양제는 612년에 1백만이 넘는 군사를 직접 이끌고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였는데, 수차례에 걸쳐서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막대한 전력만을 손실한 채 전황은 고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우기가 닥쳐올 경우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정예군 30만을 차출해서 편성한 별동부대를 평양으로 진출시켜 고구려 방어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고자 하였으나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살수전투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수군도 3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산동반도에서 서해를 가로질러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으로 직진하였으나 고구려군의 매복작전에 의하여 패퇴하였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 있어서 수군의 역할을 중시하여 총24군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함에 있어서도 13개군을 육군으로 나머지 11개군은 수군으로 편성해서 수·륙양면에서 협동작전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수의 수군은 육군과의 협동작전에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했다. 당시 수도권 지역 및 대동강 유역의 방위사령관이었던 건무는 수나라 육군이 그들의 수군으로부터 군량과 무기 그리고 인원을 보충받아 전열을 정비한 후 평양성을 공격한다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판단하고 고구려 수군을 지휘하여 이들을 평양성 외곽으로 유인한 다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한 후 남포 부근까지 추격하였으며, 패잔부대가 정박지에 잔류하고 있는 부대와 합류하여 방어선을 형성하자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후에 수나라 육군이 평양에 도달하였을 때는 이미 수나라 수군은 고구려군에 패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비된 고구려 수군에 의해 대동강 하구로 퇴군한 후 전의를 상실하여 참전의지마저 갖지 못하였다.

만일 수군을 이용한 단독공격이 성공해서 평양성이 점령당했거나, 수의 군대가 상륙에 성공하여 내륙으로 들어가 북상 작전을 펼쳤다면 을지문덕의 육군은 배후가 불안한 가운데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건무가 인솔한 고구려 수군이 대동강 하구에서 수나라 수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들을 견제한 것이 살수대첩을 가져 온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 양만춘

대고구려 전쟁에서 번번이 심대한손실을 당한 결과, 수가 멸망하고 당이 건국되었으며 당 태종은 645년에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수 양제가 요동성에 발이 묶였던 것에 반해 십여 일 만에 요동성을 함락하였으며, 안시성으로 병력을 집결하였는데, 성주인 양만춘이 장기간 항거하여 고구려의 승리로 전쟁을 끝맺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고구려 수군의 활약이다. 당이 고구려 수군을 겁내서 안시성을 돌아 우회공격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고구려의 수군은 당의 침략정책을 견제·변경케 하는 역할을 했는데, 당의 작전회의 시에 총사령관이었던 이세적은 안시성이 강하므로 약한 건안성을 먼저 붕괴시키자는 논의에 대하여 건안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북쪽에 있는 군량을 옮길 수 없으므로 인접한 요동의 군량을 바다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때 군량을 해로로 이동하다가는 고구려의 수군에게 수송로가 차단될 위험이 많다고 지적했으며, 이 정은 수군을 이용하여 압록강의 오골성을 공격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육군이 평양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을 패인으로 들고 있다. 또한 자치통감은 당이 전쟁 직후 책임을 물어 645년 11월 수군총관 장문한을 참수했음을, 신당서는 646년에 수군 책임자 장량을 옥에 가두었음을 각각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수군에 맞서당의 수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데 대한 징벌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기마군단을 활용하여 군사력이 뛰어난 대륙국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였고 중국 지역 및 요동 지역 등과는 황해북부를, 백제와는 황해 중부 이북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고 있었다.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그들은 천혜의 강점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다양하게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이용하였다. 즉 황해의 중부이북과 동해의 중부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활용하여 정치·외교적으로 중핵역할을 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바닷길을 이용하여 문화를 주고받고 중계무역을 하면서 부유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국가적 융성을 담보한 고구려 수군은 KDX로 다시 부활하여 우리에게 바다길을 지키고 해상경제활동을 보호하는 일차적 책임자로서 해군력 강화의 당위성과 자신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5-12-06 18:15:10

덧글쓰기

협력기관 및 업체 : 대한민국 공군 - 대한민국 해군 - 국방일보 - 국정브리핑 - Defense LINK - 군사저널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제2000-1호에 따른 안내, 사업자 등록번호 : 220-86-07275
(주)아이엠알코리아, 대표이사 주재은, 전화 (02) 578-8278 (■ 잡지 취급하지 않습니다. 문의사절합니다.), 통신판매업 허가 : 서초 제 3300호
광고문의 - 개인정보 취급방침 - MR 이용자 약관 - 회원관련문의 - 탈퇴신청
Copyright ⓒ 1998-2017 (주) iMR C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