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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X와 함께 떠나는 한국 해군사 (II)

해양개척을 통하여 국가적 후진성 탈피

삼국시대 때 국가발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발달된 중국의 문물을 얼마만큼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용하고 소화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육로로는 고구려에 의하여 가로막혀 있고, 해로로는 백제, 고구려에 의하여 가로막혀 있는 상태였다. 결국 고구려에 예속되어 중국문물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초기 삼국간 경쟁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다 6세기 진흥왕 때(553년)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환한 다음 다시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당항성(오늘날의 남양주)을 점령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차지함으로써 중국과의 해상교류를 통해 내적 발전을 달성하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를 정치적, 군사적 동맹국으로 확보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결정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 진평왕은 즉위 5년되는 해에(583년) 수군과 함선들을 맡아보는 전문적인 중앙통치기구로서 병부예하에 선부서를 설치하여 적극적인 해양활동 지원정책을 펼쳤다.


◆ 백제정벌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의 대당 교섭의 요충지였던 당항성을 공격하자, 648년 법민은 아버지 김춘추와 함께 당에 가서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660년 3월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한 13만 명의 당군이 백제정벌에 동원되고, 신라에서는 5월 왕이 김유신 등의 장병을 거느리고 이천(利川)으로 출병함에 따라 백제정벌을 위한 신라와 당의 동맹군이 결성되었다. 이 때 법민은 병선 백 척을 지휘하여 서해안 덕적도에서 당군을 맞이하였다는데 이 의미는 무엇일까?

당군은 황해를 건너 전진기지인 덕적도에서 군장을 점검하고 일정기간 휴식을 필요로 하였다. 이때 백제수군이 당군을 공격하게 되면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민은 병선을 이끌고 덕적도를 호위하는 한편, 신라군은 당군에 대한 백제군의 공격이 있을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도록 사비성으로 가는 지름길을 공격로로 택하지 않고 이천까지 북진한 것이다.


◆ 고구려 정벌

661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을 때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죽자 법민은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니 곧 문무왕이다. 다시 고구려 정벌 계획을 세운 문무왕은 계속해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668년 당나라가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파하고 평양성을 포위공격하자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파견하여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인궤가 신라의 김삼광(김유신의 아들)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당항포에 도착하자 김인문(문무왕의 동생)을 시켜 영접하게 하였으며 이어 신라의 수군과 당의 수군은 고구려의 해상 경비군을 격파하면서 황해로 거슬러 올라가 육군의 평양성 공격에 합세함으로써 마침내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들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묘에 고하였다.


◆ 당나라 축출과 삼국통일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 당이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자 문무왕은 부당성을 들어 항의했으며, 결국 신라와 당의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선 문무왕은 백제지역의 당군을 공격하여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켜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대신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당의 고종은 이를 문책하기 위하여 설인귀의 수군을 출동시켰지만, 백강입구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1년 10월에 신라의 김당천 부대가 출동하여 당의 군량수송선 70여 척을 격파하고 병사 100여명을 사로잡았는데, 이 때 물에 빠져 죽은 당 수군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계속해서 신라의 수군은 673년에는 대아찬 김철천이 문무왕의 명으로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서해에 수군 근거지를 설치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 수군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 조치는 당의 수군이 서해안을 통해 육군에 보급을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674년 당고종은 최종적으로 유인궤를 총지휘관으로 한 10만 명의 대병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신라 장군 문천은 수륙군을 지휘하여 한강 하구 일대에서 당군을 맞아 싸워 적 병선 40척과 군마 1천 필을 노획하고 적병 천 사백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적을 계속 추격하여 매초성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676년 11월에는 김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당 수군과 22회의 끈질긴 접전 끝에 적선 22척을 격파하고 4천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당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옮기게 하였다.


◆ 문무왕의 수군증강정책과 강인한 해양수호의지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후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는데, 특히 자신이 백제 정벌 시 직접 병선을 이끌고 당군을 맞이하였고, 수륙합동작전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나ㆍ당전쟁 시에는 수군이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이 원정군의 파견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으므로 누구보다도 수군의 중요성과 위력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해상세력의 우위를 통해 나라의 안보와 발전을 누리겠다는 구상 하에 병부에 예속되어 있던 선부서를 선부로 독립시켜 강화하였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예하의 해군을 독립시켜 해군부로 승격시킨 것과 같은 셈이다. 또한 죽어서 왜구의 침입을 막아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안에다 무덤을 만들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바다를 지키는 호국의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의 강인한 해양수호의지 덕분에 신라는 발달된 문물을 이룩하고, 후대에 청해진의 해상왕국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5-12-13 1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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