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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X와 함께 떠나는 한국 해군사 (III)

渤海, 바다이름 발, 바다 해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으며,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KDX-Ⅱ 3번함을 대조영함이라고 명명한 것은 발해가 우리의 역사임을 확실하게 대외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호에서는 대조영함을 타고 그의 생애와 그가 세운 발해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자


◆ 대조영의 진(震)건국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 유민을 분산시켰는데, 대조영도 그의 가족과 함께 요하 서쪽 영주지방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영주는 당이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는데,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 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어서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696년 이진충, 손만영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측천무후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그의 집단을 추격하였으나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에서 맞아 싸워 격파한 뒤 계속 동부만주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인 동모산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한 후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국호를 진, 한, 수, 당처럼 외자로 하고 고유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중국과 대등한 나라로 자처한 주체의식을 엿볼 수 있다.

동부만주 일대에 새로운 힘의 구심점으로 대조영 집단이 등장하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여러 부족들이 귀속하여 들어왔으며 건국 후 돌궐, 신라와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 거란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건국을 인정하였으며, 713년에는 대조영을 발해군공으로 책봉하였는데,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 장문휴의 등주원정과 해동성국(海東盛國)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가 2대 무왕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문제를 둘러싼 외교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장문휴는 중경의 서고성을 출발, 임강진을 지나 압록강을 따라 집안을 거쳐 배를 타고 요동반도 해안을 따라 산동반도 등주를 급습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는 해외원정을 감행함으로써 당나라의 기선을 제압하였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 이후, 당의 견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지만 등주원정을 통해 당나라의 간섭을 무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힘을 과시함으로써 당나라는 발해에 대해 강경책에서 화친책으로 돌아섰으며, 발해도 국가기반이 어느 정도 확립됨으로써 당과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그들의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내부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할수 있게 되어 후에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 해상세력 왕건 가문

통일 신라는 대당 무역로를 두 개 운영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청해진을 전진기지로 하는 남부사단항로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남양, 덕적도, 대동강 입구에서 요동반도의 서남단에 있는 여순으로 향하고, 거기서 묘도열도를 지나 산동반도의 등주에 상륙하여 육로로 낙양 및 장안으로 들어가는 북부연안항로였다. 중국이 다시 통일되어 그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협서성의 장안으로 옮겨진 신라말기에는 북부연안항로가 더욱 중요시 되었으며, 새로운 무역중심지로 개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왕건의 선대는 이러한 시기에 서해에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성장한 것이다.

왕건부자는 진성여왕 10년(896년)에 송악군을 가지고 궁예에게 귀순하였는데, 궁예는 개성지방의 큰 경제력과 해상활동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매후 환영하였으며 20세의 왕건은 898년 경기의 광주, 충주, 청주 등 3개주 뿐 아니라 당성을 정벌함으로써 그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 왕건의 나주 해상공략

왕건이 큰 공을 세우며 최대의 세력가로 성장하자 궁예는 왕건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이용가치에 따라 숙청될 수도 있었다. 이때 나주에서 궁예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중앙의 규제가 미치는 정도에서 후백제보다 태봉이 유리했을뿐 아니라 당시 해외 무역의 최대 시장인 북중국방면에로의 교역항로 확보를 위해서라도 서해안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태봉과의 유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태봉의 입장에서도 나주를 공략한다면 후백제의 후방을 획득함으로써 전력을 분산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남해안의 봉쇄로 후백제의 대외교를 차단, 고립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나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바닷길 뿐이었으며 태봉에는 해상무역가 출신인 왕건 외에는 그 역할을 맡을 인물이 없었으므로 왕건은 이용가치가 급상승하며 숙청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03년 3월에 왕건은 대선 10여척 등 3000여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과 주변 10군을 점령하고 지명을 금성에서 나주로 바꾸었다. 이에 견훤은 영산강을 되찾기 위해 왕건의 수군을 격파할 병력을 모으고 대규모의 전함을 건조했다. 궁예로서는 왕건의 세력확장이 부담스러웠으나 나주의 존재가치 때문에 그를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다시 출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은 진도와 영산강 하구의 고이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강으로 진입했을 때 배후를 공격당할 위험을 끊은 뒤 덕진포에서 풍세를 이용한 화공전으로 견훤의 대함대를 격파했다. 후에 견훤이 직접 병력 3천명을 거느리고서 나주를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했으나 또 다시 왕건의 수군이 출동하여 후방에서 급습해서 견훤군을 격퇴함으로써 나주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 왕건의 세력확충 및 후삼국 통일

왕건은 주로 수군활동의 성과를 통하여 태봉에서 요직에 오르게 되었으며, 군지휘권도 확대하게 되었다. 또 903년부터 거의 대부분을 나주 정벌에 종사하며 나주지역의 호족들과 깊은 연계를 맺었는데, 특히 그 지방 호족의 딸인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게 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2대왕인 혜종이 되었으며, 영암 최씨 가문 역시 왕건 정권에, 그리고 왕건 사후 왕실의 보위에 기여한 최지몽을 배출한 집단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왕건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의 확충이 이루어지자 궁예와의 갈등이 표출되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고려의 창업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부왕을 금산사에 감금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감금되어 있던 견훤이 탈출하여 나주에 있는 유금필에게 투항하여 왔다. 유금필은 견훤을 해상으로 호송하여 개성으로 보냈으며 왕건은 견훤을 후대하였다. 그리고 936년에 견훤이 역자정토를 자청함으로써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이다.

< 출처 : 해군본부 >

2006-01-04 18: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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